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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 아우구스티누스, 자유와 구속

by bookstory3 2024. 11. 3.

책을 받은 느낌

책을 받아 든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욕심이 과했구나!’ 페이지가 많아 부담스러울 것 같긴 했지만, 책 제목처럼, 재미있을 것 같아 신청했다. 하지만 실물을 받아 든 순간, 욕심이었다는 생각에 한숨이 먼저 나왔다.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이 정도 페이지였던 책이 있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더 두꺼워 보였다.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는데 ‘어?’ 생각보다 쉽게 읽혔다.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옮겨서 그런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책을 듣는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밑줄 긋는 건데, 밑줄을 그은 곳이 그리 많지 않다. 아! 중요하게 여긴 곳이 많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야기를 듣듯이 읽으니,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로 읽고 느끼면서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에 그렇다.

 

짜릿한 느낌이 몇 번 들었는데, 구슬이 꿰지는 느낌이 들 때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용 대부분은, 조각조각 듣거나 읽은 내용이다. 왜 그렇게 이루어졌는지 그래서 그 내용이 다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단편적인 구슬들이 연결되면서 꿰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게 또 그렇게 연결되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역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재미와 함께 감동 그리고 교훈을 준다.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는 신앙인으로서 알아야 할, 그리스도교 역사를 재미있게 풀어서 감동과 교훈을 준다. 역사책을 읽듯 그렇게 몇 번 반복해서 읽으면 더 새롭고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용 중 몇 가지만 소개하고 그 느낌을 나눠본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복습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이야기는, 복습하는 느낌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는 몇 번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계획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신앙인보다 더 방탕한 생활을 하고 이단에 빠져 살았음에도, 결국 돌아오게 하셨고 교회에 큰 스승 중 한 분으로 불리게 하셨으니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야기 마지막에 행복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깊이 공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단순히 고통이 없는 행복이 아닙니다.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것을 향한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기쁨과 행복,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가 보여 준 행복입니다.” p230

 

신앙 고백을 통해 우리가 닿고자 하는 곳도 행복한 삶이다.

하지만 행복한 삶은 항상 달콤한 상태가 아니다. 고통과 시련 앞에 당당하게 서서 마주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렇게 고통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놓지 않으면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수도원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도 의미 있게 읽었다.

수도원이 생겨난 배경과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수도자들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도 소개해 준다.

 

“수도자들은 세 가지 복음적 권고를 실천합니다. 즉 정결, 청빈, 순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사유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나누며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p312

 

자유와 구속

저자도 이야기하지만, 얼핏 보면 자유를 내놓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트라피스트(Trappistes)라는 엄격한 봉쇄 수도원은 더욱 그렇게 보인다. 하루하루가 기도와 고행에 연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안에 머물고 계시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연(鳶)’에 관련된 글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연은 실에 묶여있다. 그래서 실에 구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을 끊어버리면, 잘 날던 연은 그대로 고꾸라져 땅에 처박히고 망가진다. 연이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이유는, 구속하고 있다고 생각한, 실 덕분이다. 어떠한가? 수도자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이유는, 온전히 하느님께 연결되어 의탁하며 생활하기 때문이다. 내가 구속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와 연결된 실이 어쩌면 내가 자유롭게 날도록 도와주는 연(緣) 일 수도 있다.

 

아름답게만 보이는 종교도, 사람에 욕심이 더해지면 퇴색된다.

십자군 전쟁이 그렇다. 여러 차례에 걸쳐 치러진 종교 전쟁인데,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 전쟁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저자의 해석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자면 하느님은 오롯이 향유되어야 할 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부와 영예를 얻기 위해 하느님을 사용한 것입니다.” p430

 

역사의 수레바퀴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올바른 정신으로 발전시킨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철학자 혹은 평신도가 있지만, 자기 욕심에 이용한 사람 역시 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 다듬어지고 이어져 왔다. 사실 그 중심에 누가 있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어떤 공동체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나가기 때문이다. 저자도 이 부분을 강조한다. 교회는 크게,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로 나뉜다. 삼위일체의 신비처럼, 이 세 지체를 하나로 인식할 때 교회는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